땅에 그린 작품, 그대로 들어내 미술관으로

입력 2022-11-02 17:37   수정 2022-11-03 00:35


땅을 캔버스 삼아 그리는 대지(大地) 예술가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린 다음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거나 작품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긴 뒤 철거하거나. 임옥상 화백(72)의 접근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경기 파주시 장단평야 한쪽에 그림을 그렸고, 그 땅을 들어내 미술관 안에 들였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6전시실에 설치된 임 화백의 신작 ‘여기, 일어서는 땅’(2022) 얘기다. 현재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임 화백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임 화백은 장단평야 땅을 가로·세로 2m짜리 패널 36개로 나눈 뒤 미술관 벽면에 붙였다. 그렇게 1주일 동안 정교하게 짜 맞춘 흙벽은 높이만 12m에 달하는 대작이 됐다. 말 그대로 땅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땅을 일으켜 세운 대지 예술가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땅과 마주하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임 화백은 “땅은 인간의 근원이자 삶의 터전이지만, 막상 땅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며 “그래서 땅을 일으켜 세워 사람과 대면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임 화백은 지난해 추수가 끝난 직후부터 올봄까지 매일 장단평야를 찾았다. 곡괭이와 삽을 들고 논밭에 그림을 그렸다. 소나 새 같은 동물도 그렸고, 한반도 지도도 담았다. 폭우로 그림이 지워지면 남은 흔적에 곡괭이질을 더했다. 그렇게 그림이 완성되자 우레탄을 부어 탁본하듯이 땅을 떠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볏단의 흔적, 농기계가 지나간 자국, 동물 발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미술재료용으로 가공된 흙이 아니라 자연의 흙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형미 학예연구사는 “실제 논밭에 온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작품이 걸린 전시장 안의 바닥을 푹신푹신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프레임에 갇히지 않겠다”
다른 작품들의 소재도 흙이다. ‘흙의 소리’(2022)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머리를 흙으로 빚은 뒤 옆으로 뉘었다. 동굴처럼 생긴 작품 안에 들어가면 사람의 숨소리가 들린다. ‘땅이 살아있다’는 것을 시각·청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작품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안 전시마당에 설치된 ‘검은 웅덩이’(2022)가 그렇다. 임 화백은 올해 제작한 ‘따끈따끈한’ 이 작품 앞에 30년 전 만든 대형 조각 ‘대지-어머니’(1993)를 세웠다. 두 작품을 함께 놓으니 검은색 물로 가득 찬 웅덩이를 여인이 응시하는 모양새가 됐다. 웅덩이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며 30년간의 기억을 반추하듯이. 임 화백은 “검은 물로 채우니 바람과 풀에 의해 미세하게 흔들리는 움직임이 더 잘 보이고, 마치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민중화가’란 꼬리표를 떼고 싶다고 했다. 미술계는 1970~1980년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예술활동을 펼친 임 화백에게 이런 타이틀을 붙여줬다. 임 화백은 “나는 어떤 특정한 무엇이 되기 위해 미술을 도구로 사용한 적이 없다”며 “그런데도 유태인이 뭘 하든 ‘유태인 작품’이란 프레임에 묶이는 것처럼 내가 무슨 작품을 그리든 민중미술이란 낙인이 찍힌다”고 했다.

흰머리가 성성하지만, 노 화백은 여전히 ‘청년’이었다. “어떤 특정한 프레임에 묶여있는 작가는 생명을 다한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구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어디로 튈지 저도 모릅니다.” 전시는 내년 3월 12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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